[이머징 이슈]로봇콘텐츠

 콘텐츠가 없는 로봇은 빈 깡통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의 지능형 로봇산업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나서야 콘텐츠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전자신문사가 오는 23일 개최하는 ‘국제 로봇융합 콘퍼런스 2010’에서 로봇콘텐츠를 첫 번째 주제로 선정한 배경도 현 단계에서 한국 로봇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콘텐츠 분야와 과격한 융합이 매우 시급하기 때문이다.

 

 로봇콘텐츠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직업군에 따라 상이한 대답이 튀어 나온다.

 영화계 사람들은 로봇콘텐츠라고 하면 영화 ‘트랜스포머’처럼 거대 로봇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을 떠올린다. SW개발자들은 기계로봇에 탑재하는 OS, 애플리케이션을 로봇콘텐츠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는 로봇의 독창적 디자인과 움직임을 최상의 콘텐츠라고 여긴다. 통신업체는 로봇을 일종의 미디어채널로 간주하고 어떤 콘텐츠를 전송해야 통신트래픽이 늘어날지에만 관심을 보인다. 기계공학자들은 솔직히 로봇동작을 제어하는 SW 외의 콘텐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로봇융합 콘퍼런스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로봇콘텐츠란 무엇인가, 로봇과 콘텐츠의 융합산업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테마로 놓고 국내 최초로 난상토론을 벌이게 된다. 유명 만화가와 예술가, 테마파크 대표, 로봇전문가들이 각각 주장하는 로봇콘텐츠의 갖가지 미래상을 들어보라. 로봇과 콘텐츠의 융합이 몇 년 전에 비해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됐고 벌써 다양한 변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로봇콘텐츠의 현황과 문제점=요즘 로봇콘텐츠에 관심이 부쩍 높아진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천과 마산로봇랜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테마파크가 로봇콘텐츠의 최대 수요처로 떠오른 때문이다. 로봇테마파크의 성공에는 무엇보다 볼거리, 즉 콘텐츠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전의진 인천로봇랜드 대표는 국내외 로봇업계를 겨냥해 200억원의 예산을 들여 340대의 로봇을 구매한다는 운영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국내 로봇문화의 저변이 취약한 상황에서 테마파크를 찾아온 관객의 지속적 관심을 끌 만한 다양한 콘텐츠를 충분히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둘째는 교과부가 유아교육용으로 추진하는 R러닝 사업에 따라 교육용 로봇콘텐츠 수요가 크게 기대되는 상황이다. 전국 유치원생을 상대로 교육용 로봇을 보급하는 R러닝 사업에는 로봇플랫폼 제조사 외에 웅진, 대교 등 교육용 콘텐츠 기업도 앞다퉈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지능형 로봇시장에 뛰어든 기업들은 하드웨어 개발은 대체로 성공했지만 콘텐츠 개발에는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로봇콘텐츠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개발자의 창의적 감각이 무딘 경우를 제외하고 가장 큰 걸림돌은 표준화 문제다. A회사가 개발한 로봇콘텐츠가 B사의 로봇제품에선 호환되지 않는 것이다.

 콘텐츠의 호환성 부족은 전문 콘텐츠업체의 로봇시장 진출을 저해하는 원흉이다. 로봇회사마다 제각각인 콘텐츠 개발환경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정부 지원으로 로봇콘텐츠 통합개발도구도 개발했지만 보급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기업 간 경쟁관계로 회사마다 서로 호환이 안되는 로봇콘텐츠를 고집하는 사례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분명 로봇콘텐츠의 호환성만 보장되면 교육, 엔터테인먼트, 헬스 등 다양한 일상분야에서 로봇기술의 활용도는 크게 높아질 것이다. 과거 사례를 비춰볼 때 로봇업계가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하지만 로봇콘텐츠 시장을 옥죄는 표준화 문제를 극복할 해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로봇을 콘텐츠의 바다에 빠뜨려라=로봇업계는 거대 이통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콘텐츠를 확보하고 고객에 다양한 부가가치를 제공하는지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애플은 10만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응용프로그램을 갖춘 앱스토어로 스마트폰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세계 30억명 이상의 가입자를 가진 24개 이동통신사와 3개 휴대폰 제조회사가 손잡고 내년 초 글로벌 모바일 SW장터를 만든다는 소식이다. 모바일 콘텐츠 시장을 독식하는 애플에 맞서기 위해 각국의 대형 이통사들이 반애플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핵심은 애플의 앱스토어를 철저히 모방하면서도 더 큰 규모와 호환성을 갖춘 슈퍼 앱스토어를 만든다는 전략이다. 개발자는 표준화된 개발 환경을 제공받는다. 세계 30억명의 이통고객을 상대로 모바일 콘텐츠를 판매할 수 있는 거대한 사업 기회를 갖는다.

 우선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이 주류지만 향후에는 PC, TV는 물론이고 로봇까지 콘텐츠 적용범위가 확대될 것이 뻔하다. 현재 앱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아이폰 응용프로그램 중에서 약 3분의 1은 사용자와 기계 간의 상호작용을 돕는, 다시 말해서 로봇분야에 곧바로 응용이 가능한 콘텐츠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아이폰 카메라를 갖다 대면 어떤 방향에 출구가 있는지 가르쳐 주는 증강현실 프로그램을 로봇 항법장비에 접목시키면 혼자서도 길을 찾는 서비스 로봇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의 음성을 문자로 바꾸는 스마트폰 프로그램은 로봇이 주인의 육성명령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주인 입장에선 멍청한 기계인형보다 똑똑한 스마트폰이 이상적 로봇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호환성이 결여된 실험용 로봇의 지능을 높이려 애쓰기보다는 수억명이 쓰는 스마트폰의 방대한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기반으로 시청각 기능과 기동성(다리), 작업능력(팔)을 차근차근 부여하는 상용화 전략이 더 현명하다.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은 가장 저렴하고 신뢰성이 높은 오픈소스형 컴퓨터로 변모하고 있다. HD급 동영상 촬영에 멀티태스킹도 가능한 최신 스마트폰이 어느 순간 똑똑한 로봇으로 바뀐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TV광고에서는 휴대폰이 로봇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고 있다. 국내 로봇업체들은 모바일 콘텐츠 시장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전략을 써야 한다. 안드로이드 또는 애플 OS에 기반한 글로벌 로봇 콘텐츠장터(로봇 앱스토어)를 초반부터 한국이 주도하지 못할 경우 열심히 키운 지능형 로봇시장을 외국업체 입에 털어주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